코르네 씨와 베르뮤트 씨가 다녀간지도 며칠,
나는 매일을 할 일 없이 보내고 있었다.
제르니움: 아, 여긴 정말 마계라고 하기엔 너무-
제르니움: ... 지루하단 말이야.
하일: 평화로운 건 좋은 징조예요.
내 옆에서 책장을 넘기던 하일 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.
하일: 전쟁이 빈번하던 시절엔 이런 지루함을 위해서 수천의 마족들이 기꺼이 목숨을 희생했어요.
하일: 이 지루함에 대해 감사하도록 하세요.
제르니움: 그렇게 말해도 난 여기 사람이 아니라 마계의 역사 같은 건 모른단 말이에요.
하일: 그렇다면 오늘부터 교육 일정에 포함시키겠습니다.
제르니움: 방금 건 취소, 취소예요!
나는 얼른 손을 저었다.
제르니움: (하일 씨는 평소에는 다정하고 무르지만, 공부할 때 만큼은 엄청 엄격하단 말이야.)
제르니움: (끄응, 공부할 때도 좀 무르게 대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.)
그런 내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,
하일: 역사를 배우는 건 아주 중요해요.
하일: 모든 일의 기초거든요.
제르니움: (으으, 엄격해.)
제르니움: 내 기초는 인간이거든요. 마족이 아니라.
하일: 그럼 이쪽 인간계의 역사도 함께 배워볼까요?
제르니움: 아, 제발.
제르니움: 내가 잘못했어요.
죽어가는 목소리로 하일 씨에게 매달렸다.
하일: 풋.
하일 씨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.
하일: 제르니움님은 가끔-
하일: 뭐라고 해야할까.
하일 씨가 천천히 단어를 골랐다.
제르니움: (재밌어요?)
제르니움: (웃겨요?)
그러나 하일 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한번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.
하일: 귀여워요.
제르니움: 네?
하일: 귀엽다구요, 제르니움님.
갑자기 훅하고 치고 들어온 칭찬 탓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였다.
제르니움: (하일 씨는 이런 말을 자각하고 하는 걸까.)
제르니움: 노, 농담하지 마세요.
하일: 농담 아니에요.
하일: 제르니움님은 보고 있으면 재밌어요. 약간은 놀리고 싶은 매력이 있어요.
제르니움: 놀리고 있는 거잖아요, 지금!
하일: 하하, 들켰네요.
제르니움: 우씨...
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.
제르니움: (그냥 놀리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는 걸 모르는 건가.)
하일 씨의 아무 생각 없는 말에-
제르니움: (나는 왜 이렇게 설레는 거지...)
하일: 삐졌어요?
제르니움: 아니거든요.
하일: 삐졌네요.
제르니움: 안 삐졌어요.
하일: 으음.
내가 짐짓 인상을 쓰자 하일 씨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.
제르니움: (으, 저런 표정은 반칙이지.)
제르니움: (강아지 같단 말이야.)
나는 하일 씨의 슬픈 표정에 지나치게 약했다.
마음이 약해져서 이제 표정을 풀어볼까 하는데 하일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.
하일: 놀린 건 맞지만 농담은 아니에요.
제르니움: 네?
하일: 제르니움님, 귀엽다고 말한 거요.
하일: 그건 농담 아니에요.
제르니움: ...!
평소 같이 웃는 얼굴이지만 완고한 입꼬리가 진심처럼 보여서
제르니움: (어, 어떻게 해...)
마음이 마음처럼 되지 않기 시작했다.
제르니움: (하일 씨는 정말...)
제르니움: (너무 자각이 없어...)
붉어진 얼굴 위로 가볍게 손 부채질을 했다.
하일: 더우세요?
제르니움: 으응, 날이 조금 더운 것 같아서요.
하일: 그런가요?
제르니움: 그냥, 동쪽이라 그런가...
나는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.
하일: 네.
제르니움: (... 놀리는 기색도 없네.)
제르니움: (하일 씨는 알까.)
제르니움: (나한테 친절한 사람은 하일 씨 뿐이라는 걸.)
아무도 모르는 세계에 뚝 떨어졌을 때, 당장이라도 엉엉 울고 싶었다.
울지 못한 이유는 마을 사람들 때문이었다.
마을사람A: <용사님, 부디 저희를 구원해주십시오!>
마을사람B: <용사님! 마왕을 처단해주십시오!>
그들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나를 마계에 집어 넣었다.
제르니움: (친절한 사람들은 아니었지, 전부.)
혀 끝으로 아리도록 씁쓸한 맛이 밀려왔다.
제르니움: (마왕들도 그래.)
제르니움: (제대로 된 상황을 설명해준 것도 하일 씨 뿐이었어.)
내가 하일 씨를 선택한 그 날 이후로 하일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게 와주었다.
한번도 화내지 않고, 짜증부리지 않고, 귀찮아하지 않았다.
제르니움: (언제나,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봐주었어.)
생각이 차분히 정리되자 설레임보다 더 애틋한 감정이 가슴 밑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.
제르니움: (-내게 있어서 하일 씨는 정말 고마운 사람이구나.)
온 몸이 간질거리는 따뜻한 감정의 이름은 고마움이었다.
제르니움: 아, 그러고보니-.
나는 방금 떠오른 마을 사람들의 일이 궁금해졌다.
제르니움: 있잖아요, 하일 씨.
하일: 네.
제르니움: 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.
하일: 질문은 좋은 태도예요. 뭔가요?
제르니움: 마족과 인간은 왜 사이가 안 좋은 건가요?
제르니움: 역시 마족이 인간을 공격해서... 인가요?
하일: ...
내 말에 하일 씨는 처음 보는 차가운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.
제르니움: 하, 하일 씨?
하일: 제르니움님.
제르니움: 네, 네?
언제나 다정하게 웃어주던 얼굴이 냉랭하게 변했다.
제르니움: (무, 무서워...)
제르니움: 저, 저어 하일 씨. 제가 뭔가 실수라도...
하일: ... 저희는 억울해요!
제르니움: 네, 네에?
그러나 무서웠던 것도 잠시, 하일 씨는 다시 평소의 애처로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.
하일: 애초에 매번 전쟁을 일으키는 건 인간 쪽이었다고요!
제르니움: ... 네에!?!
생각지도 못한 하일 씨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.
하일: 마족들은 인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어요.
하일: 물론 인간을 싫어하고 혼혈에게 적대적인 순혈주의가 있지만,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예요.
하일: 반면에 인간들은 무조건적으로 마족을 싫어한다구요.
하일: 저희가 인간을 괴롭힌다구요?
하일: 마족은 프라이드가 높아요. 약한 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아요.
하일: 애초에 저희는 인간이 저희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은 먼저 인간계로 건너가지도 않는다구요.
제르니움: 자, 잠깐...
제르니움: 그, 그럼... 마왕을 물리치고 평화를 달라고 했던 마을 사람들의 말은?
하일 씨는 이마를 짚으며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.
하일: 당연한 얘기지만 마족은 인간보다 훨씬 강해요.
하일: 그래서 처음엔 인간에게 이것저것 도움도 많이 줬어요. 마법을 알려준다던가.
제르니움: ... 도, 도움, 도움을 줘요?
하일: 네.
단호한 하일 씨의 대답에 머리가 더욱 더 아파왔다.
하일: 마법은 애초부터 마족을 위한 기술이에요.
하일: 모든 마족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소수의 인간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게 그 증거구요.
하일: 마족들은 인간의 약함이 불쌍해서 이것저것 가르쳐줬는데 인간들은...
하일 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.
하일: 마족의 그 강함을 두려워해서 괜한 소문을 만들어서 퍼트리질 않나...
말하는 중간에, 하일 씨는 살짝 화난 듯 보였다.
제르니움: 지, 진정해요.
제르니움: (화난 하일 씨는 처음 봐.)
하일: 죄송해요.
하일: 제르니움님께 화낼 일은 아닌데, 흥분했네요.
제르니움: 아니에요. 나도 인간이니까요.
하일: 으응. 제르니움님은 원래 이 세계 인간도 아니시잖아요.
하일: 사실- 제르니움님이야말로 마족에 대한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긴 가장 큰 피해자잖아요?
제르니움: 제가요?
내 물음에 하일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.
하일: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인 이야기 때문에 갑자기 용사가 되고
하일: 또 마계에 떨어지신데다가-
하일 씨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.
하일: ... 게다가 저 같은 녀석이랑 결혼까지 해야하고요.
제르니움: 아, 그렇구나.
제르니움: 내가 피해자란 생각은 못해봤어요. 그냥 황당한 일에 연루됐다는 생각만 했었지...
하일: 제르니움님은 정말 착한 분이세요.
제르니움: 왜요?
하일: 왜라뇨?
하일 씨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.
하일: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다는 건 누군가를 원망한 적 없다는 거잖아요.
제르니움: 아니, 그런 건 아닌데...
하일: 아니에요. 제르니움님은 정말 착해요.
하일 씨가 부드럽게 웃었다.
제르니움: 아니, 내가 볼 때 착한 건 하일 씨예요.
하일: 저요?
하일 씨는 이번엔 <엄청>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.
하일: 어째서죠?
제르니움: 내가 그런 생각을 못한 건 당연히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예요.
제르니움: 그리고 나도 원망 많이 했어요, 말을 안해서 그렇지.
하일: 원망을 속으로 삭히는 것도 착한 사람의 증거예요.
제르니움: 내가 삭혔는지 갈았는지는 모르는 거잖아요?
하일: 그야...
제르니움: 하일 씨가 착한 사람이니까,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니까
제르니움: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겠죠.
제르니움: 그러니까 착한 건 하일 씨예요.
제르니움: 그리고- 이 세계에서 내게 친절한 사람은 하일 씨가 유일하거든요.
제르니움: 하일 씨 말대로 사람들은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다짜고짜 나를 마계로 보내려 했고,
제르니움: 마왕들은...
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, 시끄러운 생각이 올라오는 걸 지워냈다.
하일: 하하, 다들 개성이 강하신 분들이죠.
제르니움: (시끄러운 녀석들이란 표현을 돌려 말하고 있군.)
제르니움: 어쨌든- 그래서 난 하일 씨야말로 진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.
하일: ...
하일 씨는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.
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섬세한 선으로 그려진 초상화 같았다.
제르니움: (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빤히 보지 말란 말이야...!!)
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.
하일: 감사해요.
진중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.
하일: 제르니움님은 절 굉장히 좋게 봐주시네요.
제르니움: 그야, 하일 씨가 언제나 상냥하게 대해주시니까요.
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.
하일: 저는-
하일: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.
제르니움: (또 그런 말...)
지난 번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하일 씨의 얼굴에서 어떤 느낌이 스쳐지나갔다.
평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-
제르니움: (... 어쩐지 외로워보여.)
그 이후로 몇 분동안, 하일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.
외로워보이는 처연한 옆모습이 내게도 버거워,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.
제르니움: 엣취.
순간 분 바람이 콧 속을 간지럽혀, 찬 기운에 기침이 나왔다.
하일: 덥다더니 추우신가봐요.
제르니움: 아, 아니, 바람이 불어서...
하일: 이제 들어가죠.
방금 전의 표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늘 보는 하일 씨의 웃는 얼굴만이 남았다.
하일 씨는 내 의자를 빼주는 것도, 에스코트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.
제르니움: (역시 하일 씨는 착한 사람이야.)
제르니움: (어떤 이유 때문에 하일 씨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지 몰라도-)
나는 하일 씨의 옆 얼굴을 훔쳐보며 다짐했다.
제르니움: (나한텐 정말 착한-)
제르니움: (... 좋은 사람인 걸.)
제르니움: 있잖아요, 하일 씨.
하일: 네.
제르니움: 저 혼자서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고,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는 것도 많아요.
제르니움: 그리고 하일 씨를 귀찮게 할 때도 있어요.
하일: 그렇지 않아요.
제르니움: 아니, 나도 알아요. 하일 씨를 방해할 때도 있다는 거.
하일: 정말 아닌데-.
제르니움: 하지만 저, 잘할게요.
하일: 네?
제르니움: 잘해보일게요. 뭐든간에 잘해서 하일 씨를 기쁘게 해드릴게요.
하일: 정말요?
제르니움: 응.
제르니움: 이 세계에서 내가 아는 건 전부 하일 씨가 가르쳐준 것들 뿐이에요.
제르니움: 내가 그걸 잘 해낸다고 하일 씨가 기뻐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-.
제르니움: 그래도... 그래도 조금의 성취감이라도 느낄 수 있게...
제르니움: (지금의 내가 하일 씨에게 보답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니까.)
하일: 제르니움님.
하일 씨는 약간 감동 받은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.
하일: 기특하네요.
제르니움: 아.
그리고는 큰 손으로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.
제르니움: (응, 나는 꼭 이 사람을-)
손바닥의 온기를 느끼며, 아까 혼자 몰래 했던 다짐을 되새김질했다.
제르니움: (행복하게 해줄 거야.)
제르니움: ...
펜: ...
제르니움: ...
펜: ...
제르니움: (부, 불편해.)
점심을 먹은 뒤, 원래대로라면 하일 씨와의 티타임을 가져야하는 게 맞았다.
그런데...
하일: <제르니움님이 그렇게 말하신다면 저도 더욱 열심히 할게요.>
하일: <마왕성 지하에 옛 고서가 많이 있어요. 교육에 도움이 될 거예요.>
제르니움: (라고 얘기해놓고...)
그래서 오늘 티타임은 혼자 즐기는 건가 싶었는데-
하일: <그래서 오늘 티타임은 펜님과 함께 보내시게 될 거예요.>
하일: <펜님은 조금 엄격하셔서->
하일: <무서울지 모르지만 힘내세요!>
제르니움: (... 라고 하고 사라지면 어쩌자는 거야!!)
펜: ...
제르니움: ...
펜: ...
제르니움: (어, 어색해 죽을 것 같아.)
나와 펜은 티타임이 시작한 이래로 두마디 이상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.
펜: 너.
제르니움: 어?
펜이 갑자기 입을 열어 놀란 내가 티스푼을 떨어트렸다.
제르니움: 아.
놀란 눈으로 티스푼을 바라보고 있자 주변의 시녀가 떨어진 티스푼을 회수, 새 것을 가져다 주었다.
제르니움: (평소엔 하일 씨가 해줬는데.)
펜: 하일 녀석에게 무슨 말을 했지?
제르니움: 응?
부드럽게 홍차를 휘젓던 펜의 티스푼이 찻잔 받침 위에 내려앉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.
펜: 아, 혼내려는 건 아니다.
펜: 다만 하일 녀석이 평소보다 의욕이 넘쳐서 그것에 대해 묻고 있는 것 뿐이다.
제르니움: 아아.
제르니움: 나 별 말은 안 했는데.
제르니움: 그냥 하일 씨를 위해 뭐든 잘해보이겠다는 말 정도?
제르니움: 응, 그거 말고는 특별히... 기분 좋아질 만한 말은 안 했던 것 같아.
펜: 흐음.
펜은 조용히 찻잔의 홍차를 마셨다.
펜: 그 녀석이 의욕 넘칠만 하군.
제르니움: 그, 그래?
펜: 하일 녀석에겐 그렇다.
펜: 그 녀석, 실패의 상징과도 같으니까.
제르니움: 실패의... 상징?
내 말에 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.
펜: 실전에 약한 타입이거든, 하일 녀석.
펜: 의욕이 넘치거나 긴장하게 되면 평소에 잘하던 일에서도 실수를 한다.
제르니움: (그런 타입이구나, 하일 씨.)
연습 땐 잘하다가 실전에선 항상 실수를 하던 친구가 생각나 가슴이 짠해졌다.
펜: 그래서 처음에 너의 교육을 맡는 것도 주저했다.
펜: 자신이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다며.
제르니움: (하일 씨...)
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, 자신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.
펜: 그러니까 잘할 자신 없으면 그만둬.
제르니움: 어?
펜: 그 녀석에게 헛바람 불러 일으키지 말란 뜻이야.
제르니움: 허, 헛바람?
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단어에, 헛기침이 나왔다.
제르니움: 자, 잠깐. 헛바람이라니, 무슨 말을 그렇게 해?
내가 황당해하든 말든, 펜은 평소의 뚱한 표정 그대로 차를 홀짝였다.
펜: 헛바람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하지?
제르니움: 아니, 남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-,
펜: 잘하지 못할 일을 잘한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말하지 말라고.
펜: 하일 녀석, 너까지 제대로 못하면 또 자기 탓을 할 거다.
펜: 네가 아니어도 스스로에게 충분히 자신 없는 녀석이다.
펜: 너까지 가담할 필요는 없어.
제르니움: ...
펜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.
제르니움: (하일 씨, 작은 실수에도 엄청 의기소침해했지.)
제르니움: (하지만)
제르니움: 펜.
펜: 뭐지?
제르니움: 네 말대로라면 내가 잘하면, 하일 씨가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단 거지?
내 말에 펜의 페일 블루의 눈이 나를 주시했다.
펜: 그렇겠지.
펜: 하일 녀석이 네 교육을 담당하니까.
펜: 또한 너와 결혼하는 것도 그 녀석이니까.
나는 아까의 다짐을 생각해냈다.
하일 씨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.
제르니움: 나, 할 거야.
펜: 뭐?
제르니움: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했던 네 말, 취소하게 해줄게.
펜: 흐음-.
펜은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웃었다.
펜: 뭐, 배짱은 좋다.
펜: 너에게 하일 녀석을 맡겨도 좋을지는 아직 제대로 된 판단이 되지는 않지만 말야.
제르니움: 흥, 언젠가 너도 인정할 거다.
펜: 그렇게 되길 내 쪽도 바라는 바이다.
펜: 근데 넌 왜 그렇게 하일 녀석에게 잘해주려고 하지?
펜: 어차피 죽지 못해 선택한 결혼인데.
펜: 나는 네가 책임감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데 말이다.
제르니움: (어쭈.)
나는 어쩐지 나를 깔보는 듯한 펜의 말투에 욱, 하는 마음이 들었다.
제르니움: 좋아하니까.
펜: ...
펜이 마시던 홍차를 찻잔 받침에 올려두었다.
페일 블루색의 눈동자가 커져, 놀란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.
제르니움: 왜, 뭐!
펜: 아니, 아니다.
그리고는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.
펜: 좋아할만한 녀석이지, 하일은.
제르니움: 당연하지.
나는 괜히 심술이 난 채로 자리에 앉았다.
하일: 어라라.
제르니움: 어, 하일 씨.
티 하우스에 하일 씨가 나타났다.
하일: 펜님 기분 좋아보이시네요. 뭔가 재밌는 얘기라도 하셨나요?
펜: 응. 이 녀석이 너를-
제르니움: 악!! 하지마!!!
나는 펜의 말을 막았다.
펜: ... 많이 따르더라구.
말을 얼버무리고 나서 펜은 나를 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.
제르니움: (아, 괜히 말했어!)
펜이 하일 씨에게 말할 것 같은 불안감에 티타임이 끝날 때까지 몸을 베베 꼴 수 밖에 없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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