백업/마왕신부

[하일 루트] 파트 1

졍님졍님 2019. 3. 12. 03:48

제르니움: (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거라면-)

제르니움: (역시 정상적인 사람 옆에 있는 게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높겠지?)

 

나는 체념의 한숨을 한번 쉬고, 눈 앞의 하일 씨를 가리켰다.

 

하일: .. 저어 제르니움님?

제르니움: 전 하일 씨로 하겠어요.

베르뮤트: 뭐어, 어째서!?

라이카: 베르뮤트, 상식적으로 생각해라.

베르뮤트: 상식적으로 생각하라니?

라이카: 이 상황에서 하일 말고 다른 선택이 있겠냐.

베르뮤트: 그래도 제르니움.

베르뮤트: 날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할텐데?

제르니움: (읏, 가까워..!)

제르니움: 저, 저는 하일 씨로...

 

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.

 

아이작: 베르뮤트님, 마왕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십시오.

베르뮤트: 아아, 여자한테 선택 못 받은 적은 처음이야.

코르네: 낙심하지 마세요. 베르뮤트 씨는 다른 여성에게 인기가 많으니까요.

 

낙담한 베르뮤트 씨를 코르네 씨가 위로 했지만-,

 

베르뮤트: 그래도 제르니움에게 선택 받지 못 했다는 사실은 변함 없잖아?

베르뮤트: 그건 너무 슬프단 말이야.

 

베르뮤트 씨에겐 아무 효과도 없었다.

 

슈밍: 하하, 베르뮤트 또 차였네.

란: 마왕! 또 차였습니다. 힘내십시오!

제르니움: (저, 정신 없어...)

 

각자 자기 할 말만 하는 탓에 정신이 없어진 나는 관자놀이만 문질렀다.

 

하일: 저-

제르니움: 네?

 

하일 씨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.

 

하일: 괜찮으시겠습니까?

제르니움: 네? 뭐가요?

하일: ... 저와 결혼하는 거요.

 

하일 씨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무거운 근심이 묻어 있었다.

 

제르니움: (으음, 나까지 걱정되는 걸...)

제르니움: 그렇지만- 저어..

제르니움: 안 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나요?

하일: 그건 마신의 명령이니까 제 권한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만-

하일: 결혼하는 상대는 제르니움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.

제르니움: 그, 그러니까 하일씨로 하겠다니까요..?

제르니움: (서, 설마... 내가 싫은 건가.)

 

내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, 하일 씨가 무겁게 닫혔던 입술을 뗐다.

 

하일: 그게 아니라-

하일: 정말 저 같은 거로 괜찮으시겠습니까?

제르니움: (저 <같은 거> 라니.)

 

겸손과는 달랐다.

 

제르니움: (아니, 자기 비하에 가까운데.)

하일: 다른 훌륭한 분들을 놔두고 어째서 저 같은 걸 선택하신 건지...

제르니움: (후, 훌륭한 분들?)

 

하일 씨의 말에 나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.

 

슈밍: 라이카, 슈밍 배고파.

라이카: 아, 조금만 기다려. 아저씨도 귀찮아 죽겠거든?

아이작: 코르네님, 뒤에 숨어 계실 필요 없습니다.

코르네: 아, 그치만 여성은 아직 어려워요.

베르뮤트: 완전 상처야. 나 이제 늙은 걸까?

란: 힘내십쇼! 늙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! 솔직히 젊진 않으니까요.

펜: 시끄러운 놈들.

제르니움: ...

제르니움: 아니, 아무리 생각해도 하일 씨가 제일 훌륭해요.

제르니움: 전 하일 씨를 선택했어요.

하일: .. 정말, 정말 괜찮으시겠어요?

제르니움: 네.

제르니움: (그래야 제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아요.)

하일: ...

하일: 저 같은 걸로도 괜찮으시다면 부디-

 

천천히, 하일 씨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.

 

제르니움: 남자 손은 크네요.

하일: 하하.

 

나는 머뭇거리며 하일 씨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.

 

펜: 그래서, 선택엔 변함이 없는가?

 

펜 씨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.

 

제르니움: .. 네.

 

나는 하일 씨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.

 

펜: 결과엔 변동이 없다.

베르뮤트: 정말? 정말? 와, 완전 충격이야.

펜: 시끄럽다, 베르뮤트.

베르뮤트: 사랑에 실패한 남자의 슬픈 목소리를 그렇게 표현하다니.

하일: 하하.

제르니움: (.. 역시, 하일 씨가 가장 정상적인 선택이었어.)

펜: 그럼 하일.

펜: 그럼 먼저 돌아가도록.

하일: 네? 하지만 펜님과 함께 돌아가는 게 절차에 맞습니다.

펜: 절차보단 내 명령이 우선이다.

펜: 이 쪽은 내가 정리할테니 너는 여자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도록.

하일: 네.

 

하일 씨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.

 

제르니움: (깍듯하네, 하일 씨.)

제르니움: (아무리 봐도 하일 씨가 한참 연상 같은데- 마왕이랑 보좌관 직급이 그렇게 차이나는 건가?)

하일: 그럼, 가실까요?

제: 아, 네.

 

하일 씨가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웃어서,

 

제르니움: (... 자.. 잘 생겼어.)

 

나도 모르게 조금 두근거리고 말았다.

 

제르니움: (앞으로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에 남자 얼굴이 잘생겼다고 두근거리기나 하다니.)

제르니움: 휴...

 

한심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.

 

하일: 괜찮으세요?

제르니움: 네, 괜찮아요.

제르니움: (엄청 걱정하는 목소리네.)

제르니움: (뭐가 그렇게 걱정인거지...?)

하일: 손, 놓치면 안 돼요.

제르니움: 네.

 

겹친 손에 힘을 주어 잡자- 환한 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.

 

제르니움: ...

하일: 이제 눈 뜨셔도 돼요.

 

부드러운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.

 

제르니움: 와아!

제르니움: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!

 

내가 눈을 뜬 곳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넓은 방 안이었다.

 

하일: 마음에 드시나요?

제르니움: 네, 네! 너무 예뻐요!

하일: 다행이네요.

 

하일 씨가 부드럽게 웃었다.

 

하일: 앞으로 제르니움님이 머무를 방입니다.

제르니움: 내, 내 방이요?

하일: 네.

제르니움: (이렇게 넓은 방을 나 혼자 쓴다고?)

 

말이 좋아 <방>이지, 보통의 집보다 커다란 공간이었다.

놀란 얼굴을 한 내게 하일 씨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.

 

하일: 표정이 복잡하시네요.

하일: 혹시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신건가요?

하일: 그런거라면 당장 수정을...

제르니움: 아뇨, 아뇨.

제르니움: 그, 그게 아니라-

제르니움: 너무 넓은 곳인데 저 혼자 써도 되나 싶어서요.

하일: 아, 그런거였나요.

하일: 걱정하지 마세요. 이제- 음...

 

하일 씨가 잠시 멈칫했다.

 

제르니움: (뭐지?)

하일: 저, 저와 결혼을 하시게 되면 함께...

 

하일 씨의 머뭇거림이 순식간에 이해되었다.

 

제르니움: (저, 정말 하는 거야, 결혼?)

제르니움: (이 사람이랑?)

제르니움: (오늘 처음 본.. 인간도 아닌 마왕이랑?)

 

다시 한 번, 머리가 복잡스러워졌다.

 

제르니움: 저, 하일 씨.

하일: 네.

제르니움: 계속 똑같은 걸 물어봐서 죄송한데요.

 

나는 하일 씨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.

 

제르니움: 정말 해야하는 건가요.

제르니움: ... 결혼?

하일: ... 죄송해요.

제르니움: 네?

 

예상 밖의 사과에 당혹감이 밀려왔다.

 

하일: 마신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입니다.

하일: 현 마왕님들이라면 거절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

하일: 저는 아직 차기 마왕의 입장이라서 거절은 절대로 불가합니다.

하일: 죄송합니다. 저같은 녀석이랑 결혼이라니...

제르니움: (아, 아니. 핀트가 조금 이상한데...?)

 

나는 <처음 보는 사람과의 결혼>이 불만인 건데,

 

제르니움: (하일 씨는 꼭 <자신과의 결혼>이 불만이라고 느끼는 것 같네.)

제르니움: 아니, 잠깐.

하일: 네?

제르니움: 전 하일 씨가 싫은 게 아닌데요.

하일: ... 제가 싫으신 게 아니었어요?

제르니움: 아니, 보통 이런 상황에선 좋고 싫고가 없어요.

제르니움: 난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는 세계에 떨어졌는데 하일 씨라고 보자마자 좋고 싫고 할 게 어딨겠어요.

하일: 그렇지만-

 

하일 씨는 꼭 버려진 강아지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내 시선을 피했다.

 

하일: 저는 자신이 없는 걸요.

제르니움: 자신?

하일: 제르니움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요.

제르니움: ... 행보오오옥?

 

생각지도 못한 진지한 대답에 놀랐다.

 

제르니움: 자, 잠깐만.

제르니움: 해, 행복이요?

하일: 네, 행복.

하일: 제가 제르니움님과 결혼하게 되면 제르니움님의 남편이 되는 거잖아요?

제르니움: 그야, 그-, 그렇죠.

하일: 그럼 당연히 전 제르니움님을 행복하게 해드려야하는 의무가 생기잖아요.

제르니움: (이, 이 사람...)

제르니움: (순진한 거야, 아니면 핀트가 다른 거야?)

 

나는 다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.

 

제르니움: 끄응... 저기 하일 씨.

제르니움: 보통은 이런 상황에 <네, 결혼하겠습니다.>하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아요?

하일: 그런가요?

제르니움: 네, 보통은 그래요.

하일: 하지만 명령이니까요.

 

하일 씨는 명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.

 

제르니움: 명령이라고 하면 뭐든 따르는 거예요?

하일: 정말 불합리한 명령이 아니라면 절대 복종이에요.

제르니움: (처음 보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더 한 불합리라는 게 있는 건가?)

제르니움: (아무래도 이 곳 사람들과 나는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네.)

제르니움: 어쨌든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의 결혼이 싫은 거예요.

제르니움: 절대로 하일 씨와 결혼하는 게 싫은 게 아니에요.

제르니움: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누구나 없으니까

제르니움: 그렇게 너무- 너무, 음.

하일: ...?

제르니움: ... 아.

제르니움: 시무룩해 있을 필요는 없어요.

 

하일 씨는 천천히 시선을 굴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.

 

제르니움: (우와, 눈동자가 체리색이야.)

하일: 당신은 참 상냥하신 분이군요.

제르니움: ...!

 

부드럽게 웃는 하일 씨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또 다시 가슴이 뛰고 말았다.

 

제르니움: (그러니까 왜 이런 상황에서 설레고 있냐고...!)

 

나는 양손을 들어, 달아오른 뺨에 갖다 대었다.

 

하일: 왜 그러시죠?

하일: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?

제르니움: 아, 아니, 아니에요!

하일: 괜찮으세요?

 

하일 씨가 나를 살피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.

 

제르니움: (그, 그러니까...!!)

제르니움: 아, 아니에요!

하일: 앗.

 

나도 모르게 하일 씨를 밀치고 말았다.

 

하일: ... 아...

제르니움: 아, 저기, 그게-

제르니움: 저어- 그... 미, 밀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. 죄, 죄송해요.

하일: 아니에요. 괜찮아요.

제르니움: (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상처받은 표정인걸, 하일 씨.)

하일: 갑자기 다가가면 누구라도 싫을만 해요.

제르니움: 아니, 그게 아니에요.

제르니움: 싫은 게 아니라 갑자기 다가오니까- 노, 놀라서...

하일: 아, 죄송해요.

하일: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에요.

하일: 저는 그냥 제르니움님이 불편해 보이시길래...

 

하일 씨가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.

 

제르니움: (윽, 내가 엄청 나쁜 짓 한 것 같잖아.)

제르니움: 아니, 아니에요. 제가 죄송해요.

하일: 아닙니다. 죄송해요.

제르니움: 아니, 제가 더 죄송해요.

 

영원할 것 같은 사과의 릴레이는 그로부터 몇 분 뒤에서야 끝이 났다.

 

제르니움: (이, 이 사람 정말 마족이 맞나?)

제르니움: (이 모습은 마족이라기보다는...)

제르니움: (... 천사에 가까운데.)

 

해사하게 웃는 모습은 판타지 책에서 보던 마족들과는 거리가 멀었다.

 

하일: 음, 그러면 어떻게-

하일: 목욕부터 하시겠어요?

제르니움: 모, 모, 목욕이요?

하일: 네.

제르니움: (가, 갑자기 웬 목욕?)

 

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.

 

하일: ...?

제르니움: ...

하일: ...!!

하일: 제르니움님, 지금 이상한 생각하셨죠?

제르니움: 아, 아니요. 아니, 아닌데요!

하일: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시간이 비어서 목욕부터 권해드린 거거든요.

 

하일 씨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.

 

제르니움: 아, 아니거든요!

제르니움: 누가 이상한 생각했대요?

하일: 근데 왜 뒷걸음질 치시는 건데요?

제르니움: 그, 그야... 그... 그냥 뭐-

제르니움: (으악!!! 창피해!! 그만, 그만 말해!!!)

 

뻔뻔한 척 하는 내게,

 

하일: 흐응.

 

맑은 체리빛의 질책이 돌아왔다.

 

하일: 제르니움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-,

제르니움: 그, 그만! 그만 말해요!

 

나는 반사적으로 하일 씨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.

 

하일: ...!!!

제르니움: 아, 미, 미안.

제르니움: 미안합니다.

 

당황해 커진 체리색 눈동자를 보자 정신이 들었다.

 

제르니움: 노, 놀라서 그랬어요.

 

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.

 

하일: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놀라신 거예요?

제르니움: 뭔가 들으면- 엄청 부끄러울 듯한 말을...

하일: ... 풋.

 

하일 씨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.

 

제르니움: 왜, 왜요...!

하일: 제르니움님,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분이신 것 같아요.

제르니움: 저요?

하일: 네.

 

하일 씨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었다.

 

제르니움: (으, 잘생겼어.)

 

다정하게 웃는 모습은 내 상황을 잊게 할 만큼 근사했다.

 

하일: 다행이에요.

하일: 아무리 명령 때문에 하는 결혼이라고 해도 재미있는 분과 하고 싶었거든요.

제르니움: 응, 그건 나도 동의해요.

하일: 사실 그런 면에서도 조금 죄송해요.

제르니움: 네?

제르니움: 또 뭐가요?

제르니움: (죄송한 것도 많네.)

하일: 전 재미있는 편은 아니거든요.

제르니움: 음, 그치만...

하일: 그치만?

제르니움: 좋은 분 같아요.

하일: ... 제가요?

 

하일 씨는 진심으로 놀란 듯 했다.

 

제르니움: 네.

제르니움: (그리고 잘 생겼고요.)

 

뒷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삼켰다.

 

하일: ... 착각이에요, 그건.

 

사뭇 진지해진 말투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.

 

하일: 제르니움님은 모르시겠지만-

하일: 전 사실 그렇게 좋은 녀석은 아닙니다.

제르니움: 왜요?

하일: 으음...

 

하일 씨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.

 

하일: 저는 잘하는 것도 별로 많지 않습니다.

하일: 그리고 성격도 좋지 못하고요.

 

하일 씨의 모습 위로 아까 전의 시끄러운 마왕들이 생각났다.

 

제르니움: (아니, 그 사람들에 비하면 충분히 성격이 좋은 것 같은데.)

제르니움: 글쎄요.

제르니움: 하일 씨와 오늘 처음 만났지만,

제르니움: 전 좋은 것 같아요. 하일 씨 성격이요.

하일: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합니다만,

하일: 지낼수록 실망하시게 될까봐 두렵네요.

제르니움: (... 이 사람 걱정이 팔자인 스타일이군.)

제르니움: 하일 씨는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네요.

하일: 제가요?

제르니움: 보통은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길 싫어할까봐 바로 겁먹진 않잖아요?

하일: 제가 별로 자신감 있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.

제르니움: (왜지?)

 

나는 하일 씨를 꼼꼼히 살펴보았다.

훤칠하게 큰 키와 부드러운 머리카락, 맑은 체리색 눈동자와 매끄러운 피부- 무엇보다 다정함이 넘쳐흐르는 인상.

 

제르니움: (자신 없을만한 스펙이 아닌데.)

하일: 아, 하지만.

제르니움: 하지만?

하일: 처음 보는 여자를 덮치는 그런 나쁜 놈은 아닙니다.

제르니움: !!!!

 

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.

 

하일: 목욕은 정말 시간이 비어서 권해드린 거예요.

하일: 마계의 사막 속 동굴 안에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계신 걸 마왕성으로 옮긴 거라

하일: 목욕이 필요하실 것 같았거든요.

하일: 다른 생각은 일절 없으니 오해하지 마세요.

제르니움: 죄, 죄송... 죄송합...

하일: 하하하, 장난이에요.

 

하일 씨가 가볍게 웃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나에게 다가왔다.

 

하일: 제르니움님.

하일: 얼굴 보여주세요. 장난이에요.

제르니움: (가, 가, 가까이, 가까이 오지 마...!!)

 

하일 씨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얼굴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.

 

제르니움: 오, 오, 오, 오지, 오지 말아요.

제르니움: 앗.

하일: 제르니움님.

제르니움: ...!!

하일: !!!

 

뒤로 넘어가는 나를 잡기 위해 하일 씨가 얼른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, 하일 씨는 내 뒤통수를 감싸안은 채 내 위에 엎어졌다.

 

제르니움: (가, 가까워!!)

하일: 오, 오해, 오해입니다...!

제르니움: 아, 알았으니까...!

 

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때,

 

제르니움: (이, 이, 이, 이거 진짜...!!!)

펜: 하일.

 

펜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.

 

하일: 페, 펜님!

제르니움: ...!!

 

하일 씨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.

 

펜: ...

 

펜 씨는 뚱한 표정으로 방을 살필 뿐, 별다른 말이 없었다.

 

제르니움: (모, 못 본 건가? 못 본 거겠지?)

펜: 지금 돌아왔다.

펜: 돌아온 김에 오늘 저녁 식사는 조금 당길까 하는데.

펜: 채비하고 여자를 데리고 나오도록.

하일: 네.

 

할 말을 다 한 듯, 펜 씨가 뒤로 돌아섰다.

 

펜: 아.

 

잊은 게 있다는 듯, 펜 씨가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.

 

펜: 결혼도 하기 전에 그러는 건 조금-

제르니움: 아니거든!

하일: 아니에요!!

펜: ...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.

 

펜 씨는 귀를 막고 사라져버렸다.

 

하일: ... 저녁.. 드시러 가시죠.

제르니움: ... 네.

 

나와 하일 씨는 한동안 말 없이 허공만 바라보았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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