제르니움: 주, 죽을 것 같아.
제르니움: 너무 어렵잖아.
지하 성에서 하일 씨가 가져온 고서들은 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내용들 뿐이었다.
제르니움: (마계의 근원과 마신의 존재, 마왕의 탄생...)
하일: 제르니움님, 많이 힘드세요?
제르니움: ... 네.
제르니움: 솔직히 판타지 소설이라도 좀 읽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네요.
하일: 판타지 소설?
제르니움: 아, 뭐... 그런 게 있어요.
제르니움: (설명하는 것도 지친다.)
하일: 이거라도 마시고 하세요.
하일 씨가 테이블 위에 찻잔과 티푸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.
제르니움: 아, 고마워요.
하일: 제가 더 고맙죠.
제르니움: 하일 씨가요? 왜요?
하일: 음, 앉아도 될까요?
하일 씨가 내 옆의 빈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.
제르니움: 네.
나는 살짝 몸을 틀어,
하일 씨가 앉기 편하도록 공간을 마련했다.
하일: 어려운 건 없어요?
제르니움: 음...
하일: 사실대로 말해주세요.
제르니움: ... 전부?
하일: 하하하.
하일 씨는 내 말을 농담으로 느낀 듯, 가볍게 웃었다.
제르니움: (진짠데.)
하일: 농담도 잘하시네요, 제르니움님은.
제르니움: (아니, 진짜라니까.)
하일: 정말 재밌는 분이세요.
제르니움: 하, 하하하...
하일: 지금 엄청 잘하고 계세요, 제르니움님.
하일 씨의 시선이 따뜻해-
제르니움: (... 어쩐지 정말로- 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네.)
마음이 조금 부드럽게 풀렸다.
제르니움: 제가요?
하일: 네, 진심으로요.
제르니움: 또 놀리는 거 아니고요?
하일: 놀리다니요. 이런 걸로 왜 놀리겠어요.
제르니움: 그렇지만 나 역사도 자주 까먹고, 마법은 완전히 쓰지도 못하는 걸요.
제르니움: 또 뭐만 하면 펜이 자꾸 잔소리하고...
하일: 아니에요.
하일: 제르니움님 정도면 정말 안 혼나시는 거예요.
하일: 펜님, 원래는 더 엄격하신 분이거든요.
하일: 저 때는 생각만 해도... 어휴.
하일 씨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.
제르니움: (윽, 귀여워.)
살짝 찌푸린 인상이 잠투정하는 강아지 같아보였다.
제르니움: (나도 팔불출에 중증이야.)
멋대로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.
하일: 아무튼 제르니움님, 정말 잘하고 계신 거예요.
하일: 아무 것도 모르는 세계에 와서 이만큼이나 하고 계시잖아요.
제르니움: 그야- 하기로 했으니까요.
제르니움: (나는 하일 씨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걸.)
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뒷 문장을 삼켰다.
하일: 그래서 고맙다는 거예요.
제르니움: 네? 아...
하일 씨는 또 전처럼 큰 손으로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.
하일: 제르니움님이 열심히 하시는 이유-
하일: 저와 한 약속을 지켜주시려고 그런 거잖아요.
하일: 저는 그것만으로도 좋아요.
제르니움: 으응, 약속은 지켜야죠.
하일: 책임감이 강한 분이네요.
제르니움: 하일 씨만 하겠어요.
하일: 네?
내 말에, 하일 씨는 나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어갔다.
제르니움: (아, 바보. 말하지 말 걸.)
사라진 온기가 안타까워, 나는 짧게 하일 씨의 손을 바라보았다.
하일: 제가 책임감이 강해요?
제르니움: (... 하일 씨는 자길 칭찬하는 말에는 죄다 놀란 표정으로 반응하네.)
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.
제르니움: 하일 씨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날 대해줬잖아요.
제르니움: 내가 짜증날 수도 있고 또 귀찮을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.
하일: 전혀요. 오히려 제르니움님은 스스로 잘하시는 걸요.
제르니움: 으응. 하일 씨는 밥 먹는 것, 옷 입는 것 같은 사소한 것에도 날 신경써줬잖아요.
제르니움: 언제나 날 가르쳐주고, 항상 잘할 수 있게 도와줬잖아요.
제르니움: 저는 그게 어지간한 책임감으로 되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거든요.
하일: 으음...
제르니움: (아, 또 그 표정.)
하일 씨는 지난 번 지어보였던 애틋한-
제르니움: (외로워보이는 얼굴...)
제르니움: 제가, 뭔가 잘못 말했나요?
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하일 씨의 애절한 표정이 싫었다.
하일: 아니요, 아니에요.
하일: 정말-
하일: 제르니움님 때문이 아니에요.
제르니움: ...
하일: ...
제르니움: ...
하일: ... 후우.
침묵 끝에, 하일 씨가 뱉은 것은 낮고 가벼운 한숨이었다.
하일: 제르니움님이 그러셨죠. 제가 착하다고요.
제르니움: 네.
하일: 하지만 전 착하지도, 책임감이 강하지도 않아요.
하일: 저는 그냥 명령에 따르는 것 뿐이에요.
제르니움: 네?
순간, <명령>이란 단어가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.
제르니움: (아, 명령...)
하일 씨가 나와 결혼하는 이유는 명령 때문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.
제르니움: (아, 알고 있었는데-)
제르니움: (난...)
하일 씨도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내게 잘해준 게 아닐까 하고-
제르니움: (기대했네.)
혀 끝에 쓴 맛이 닿았다.
제르니움: ... 그, 그렇죠. 명령, 명령이죠.
나는 실망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쾌활한 척을 해보였다.
제르니움: 저도 알거든요, 그 정도는.
하일: 하하.
평소처럼 웃는 하일 씨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.
제르니움: (안 돼. 여기서 티내면 안 돼...)
나는 괜찮은 척 웃어보였다.
제르니움: 그래도, 명령 때문에라도, 나한테-
제르니움: 시,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.
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.
글자 사이에 가시가 박혀있어, 뱉어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쓰리고 아팠다.
제르니움: (아니, 내가 하고 싶은 말은...)
제르니움: (명령이 아니었으면 해요.)
나는 얼른 고개를 도리 저었다.
제르니움: (말할 수 없어.)
제르니움: (어색해지고 싶지 않아...)
하일 씨와는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사이였다.
제르니움: (거절 당한 뒤의 어색함 따위 견디고 싶지 않아.)
하일: ... 제르니움님.
하일 씨는 갑자기 고개를 기울여, 가까이로 다가왔다.
하일: 정말, 알아요?
제르니움: 네?
하일: 제가 명령 때문에 제르니움님께 신경 쓰는지-
하일: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선지- 아냐구요.
제르니움: (가까워...)
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하일 씨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.
어째서일까,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- 가까워서인지...
제르니움: (... 달라보여.)
하일: ... 풋.
하일 씨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.
제르니움: 왜, 왜, 왜, 왜 웃는 건데요!
하일: 방금 제르니움님, 엄청 긴장하셨죠?
제르니움: ...!!!
하일: 아, 죄송해요. 제르니움님, 표정에 감정이 다 드러나니까- 놀리고 싶어져서, 하하.
제르니움: ... 아, 진짜!
달아오른 얼굴을 들켰다는 게 참을 수 없이 창피해져, 나도 모르게 가볍게 하일 씨의 팔을 때렸다.
하일: 아, 아파요.
제르니움: 왜 사람을 놀려요! 진짜, 하나도 안 착해!
하일: 하하, 말씀 드렸잖아요. 저 하나도 착하지 않다고.
그렇게 말하고 웃는 모습에 또 마음이 풀려버린다.
제르니움: (아... 난 이 사람은 절대 못 이길 거야.)
제르니움: (더 좋아하는 사람이 항상 지니까.)
하일: 죄송해요. 그치만 놀릴 때 얼굴이 귀여우셔서.
내 속도 모르고 웃는 하일 씨가 얄미웠지만-
제르니움: (... 얄미워도, 내가 항상 져도 상관 없어.)
제르니움: (하일 씨에겐 명령이라도 나는 하일 씨와 있는 게 좋으니까.)
모든 행동의 이유가 감정인 나와 달리, 모든 행동의 이유가 명령인 하일 씨.
제르니움: (슬프지만 인정해야지...)
가시를 삼키듯 따갑게, 우리 두 사람의 차이를 삼켰다.
하일: 그래서 다른 모르는 건 없나요?
하일: 특별히 어려운 거라든가.
제르니움: 말했잖아요. 전부 어렵다구요.
하일: 흐음.
하일 씨는 내가 펼쳐놓은 책 중 하나를 집어 꼼꼼히 살펴보았다.
하일: 저는 제르니움님이 잘하고 계셔서 어려울 거란 생각은 못했었거든요.
하일: 근데 어렵긴 하겠네요. 원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시니까요.
제르니움: 맞아요. 그래서 좀 재밌는 면이 있기도 해요.
하일: 어떤 게요?
제르니움: 그냥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구나-
제르니움: 우리랑은 많이 다르게 발전했구나 하는 점들이 신기한 거죠.
하일: 음.
하일 씨는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뿌듯하단 눈으로 웃었다.
하일: 아, 이런 자세 좋아요.
제르니움: 네?
그리고는 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.
하일 씨는 요즘 들어 부쩍 내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 주었다.
제르니움: (조, 좋긴 한데 뭔가-)
제르니움: (애 취급 당하는 느낌...)
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하일 씨의 손을 뿌리칠 수 없어 나는 가만히 손바닥의 온기를 느꼈다.
하일: 아, 그래서 그런 거였네요.
제르니움: 뭐가요?
하일: 펜님이 요즘 제르니움님의 태도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고 계세요.
제르니움: ... 펜이요?
하일: 네.
하일 씨는 내 머릴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.
하일: 뭐더라.
펜: <요즘 그 녀석의 태도가 꽤 만족스러워.>
하일: ... 였던가?
제르니움: 펜이요?
하일: 네. 펜님, 칭찬엔 인색하신 분이신데. 대단해요.
제르니움: 무슨 일이지, 펜이 내 칭찬을 다 하고.
나로서도 의외의 이야기였다.
제르니움: (의외로 좋은 녀석이었나, 펜?)
나는 고개를 갸웃하고, 부드럽고 향긋한 차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.
하일: 그리고 또 뭐였지.
펜: <그 녀석, 네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 거다.>
펜: <장담하지.>
제르니움: 푸우-!!!
나도 모르게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뱉어버렸다.
제르니움: (페, 펜 녀석...!!!!)
하일: 괘, 괜찮으세요? 뭐가 걸리신 건가요?
제르니움: 아, 아뇨. 죄, 죄송해요.
하일 씨는 손수건을 꺼내어 내 입가를 꼼꼼히 닦아주었다.
제르니움: 아, 아니, 이 정도는 제가-
하일: 가만히 계세요.
상냥한 얼굴로 내 입가를 닦아주는 하일 씨를 몰래 훔쳐보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-
제르니움: (차... 뱉을 때 얼굴- 엄청 못생겼을 텐데.)
창피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.
하일: 어디 목에 걸리시거나 한 건 아니죠?
내 얼굴을 꼼꼼히 닦아준 뒤, 하일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.
제르니움: 아뇨, 아뇨. 그냥- 음, 사례가 들려서.
하일: 그럼 다행이고요.
하일: 아무튼 펜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서-
제르니움: (아, 그 자식! 입 싼 자식!)
하일: 저 조금 뿌듯했어요.
제르니움: 네?
하일: 조금 건방지긴 하지만 제가 제르니움님께 의지가 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.
하일: 죄송해요. 좀 주제 넘은 생각이죠?
제르니움: 아니에요.
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.
제르니움: 하일 씨는- 저한테 아주 많이 의지가 되는 사람이에요.
제르니움: 제가 항상 이런 말 했었잖아요.
하일: 으음, 그치만 믿어지지 않는 걸요.
제르니움: 믿어지지 않아요? 내 말이 그렇게 진실성이 없었나...
하일: 아니아니, 그런 게 아니에요.
하일 씨가 놀란 눈으로 손을 내저었다.
하일: 저 같은 걸 의지하시다니.
제르니움: ... 하일 씨는 항상 자신이 없네요.
하일: 잘하는 게 없으니까요.
제르니움: 으음, 내가 볼 땐 충분히 잘하는 것 같은데.
하일: 잘하고 계신 건 제르니움님이죠.
제르니움: 아니- 그렇지 않아요.
나는 다시 책을 내려다보았다.
활자 위에 내가 덧쓴 낙서들이 보였다.
하일: 그러면 잘하고 계신지 아닌지 확인해볼까요?
제르니움: 어떻게요?
하일: 시험 보면 되죠.
제르니움: (윽.)
괜히 말했다, 라고 느끼기도 전에 하일 씨가 빙그레 웃으며 양피지를 펼쳤다.
하일: 보세요. 어렵다고 말은 하셨지만 결국에는 통과하셨잖아요?
제르니움: (그야 그런 얼굴로 계속 응원하고 있으니까...)
제르니움: 몰라요. 피곤해.
하일: 저녁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?
제르니움: 음, 글쎄. 고기?
하일: 고기는 항상 드시잖아요.
제르니움: 그치만 고기가 맛있단 말이에요.
하일: 편식하면 안 돼요.
하일 씨는 짐짓 무서운 선생님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-,
제르니움: (으, 귀여워.)
하일: 어쨌든- 엄청 잘하고 계세요, 제르니움님.
제르니움: 그럼 다행이고요.
하일: 자신이 없는 건 제가 아니라 오히려 제르니움님 쪽 아니에요?
제르니움: 그야 뭐- 난 완벽해야할 필요가 있으니까요.
제르니움: (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는 하일 씨 때문인데-, 하일 씨는 명령 때문에 나한테 신경써주는 거라니...)
제르니움: (알고는 있지만 직접 들으니 더 충격이야...)
제르니움: 휴.
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.
하일: 많이 피곤하신가봐요?
제르니움: 뭐, 빈둥거리다가 공부하려니까 좀 머리 아프네요.
하일: 저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안 하셔도 돼요.
제르니움: 싫어요. 잘하기로 했잖아요.
하일: 음-
하일 씨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.
하일: 그냥.
제르니움: 네?
하일 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.
하일: 저는 그냥-
하일: 제르니움님이 제 곁에 있어주시는 것만으로 좋아요.
제르니움: (저런 말들이 내게 어떻게 다가오는지...)
심장이 분명한 소리로 뛰기 시작했다.
제르니움: (... 모르겠지.)
나는 해사하게 웃는 하일 씨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.
제르니움: (알 리가 없지...)
제르니움: (... 하일 씨...)
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.
하일: 제르니움님,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.
하일: 사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기쁘게 해줘야지-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,
하일: 그리고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많지 않거든요.
제르니움: ...
하일: 제르니움님은 참 상냥해요.
제르니움: (아니, 상냥한 게 아니에요.)
제르니움: (나는 하일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...!)
하지만 생각은 말이 될 수 없었다.
하일: 아, 그래도 기뻤어요.
제르니움: 뭐가요?
하일: 열심히 해서 저를 기쁘게 해주겠다는 말이요.
하일: 그 말 처음에 들었을 때, 엄청 기뻤어요.
하일: 그리고 고서를 찾으면서 한번 더 느꼈어요.
하일: 그게 정말 고마운 말이라는 걸요.
제르니움: 고마운 말?
하일: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힘든 일을 자처하는 거, 보통은 쉽게 못해요.
하일: 누구나 자기가 편하고, 자기가 좋은 걸 원하니까요.
하일: 하지만 제르니움님은 절 위해서 귀찮고 힘든 일을 하시잖아요?
제르니움: 음, 그거야 하일 씨가 날 위해서 먼저 해줬으니까요.
하일 씨의 다정한 모습들이 스쳐지나갔다.
제르니움: (비록 그게 전부 명령 때문에 한 일들이라고는 해도...)
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<명령>이란 단어를 곱씹었다.
제르니움: 물론 그게 다 명령에 의한 행동이었겠지만요.
하일: 흠.
하일 씨는 잠시 생각하는 듯, 턱을 괴고 앉았다.
하일: 제르니움님.
제르니움: 네.
하일: 제르니움님은 제가 명령 때문에 억지로 싫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?
제르니움: ...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.
하일: -아닌데.
제르니움: 네?
하일 씨는 턱을 괸 상태로 나를 바라보았다.
시선을 피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.
하일: 좋아서 하는 일이기도 해요.
하일: 저, 제르니움님을 좋아해요.
제르니움: 네, 네, 네에!?!?!!
하일: 아,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.
내가 낸 소리에 당황한 듯, 하일 씨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.
하일: 제가 말한 좋아한다는 게 이성적인 고백은 아니에요.
하일: 그러니까 음... 제르니움님이라는 <인간>, 그 자체를 좋아한다고 해야할까요?
하일: 그러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.
제르니움: 아, 아니, 기, 기분 나쁜 거 아니에요!
하일: 그치만 방금 엄청 놀라셨잖아요.
제르니움: 그야! 내가 하일 씨를-
제르니움: (고, 고백하면 안 돼!!!)
하일: 저를?
제르니움: 그, 그러니까...
나는 서둘러 말을 생각해냈다.
제르니움: 갑자기 고백할 사람 같진 않았어요.
제르니움: 아무튼 기분 나쁜 거 아니에요.
제르니움: 하일 씨는 조금 더 자기에게 자신감을 가져야해요.
하일: 하하,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니면 다행이고요.
제르니움: (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너무 좋았단 말이에요...!!)
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 식은 차를 들이부었다.
하일: 제르니움님이랑 같이 있는 거 재밌어요.
하일: 가르쳐주는 것도, 대화를 하는 것도, 그냥 보고 있는 것도요.
제르니움: 놀리기 쉬운 타입이라는 말 하고 싶은 거죠?
하일: 그것도 맞아요. 그리고-
하일 씨가 손을 뻗었다.
머리를 쓰다듬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하일 씨는 얼굴에 붙어있는 내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.
하일: 제르니움님은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인걸요.
제르니움: ...!!!
제르니움: (아, 아냐. 이건 날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!! 그냥 인간적으로 좋다는 뜻이야!!)
아무리 마음을 진정시키려해도 통하지 않았다.
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익고 손 끝이 떨려왔다.
하일: 정말이에요.
하일 씨가 해사하게 웃었다.
제르니움: (아, 입 맞추고 싶어...)
제르니움: 고, 고마워요.
나는 전하지 못할 마음을 다른 말로 감추어 말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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