백업/마왕신부

[하일 루트] 파트 3

졍님졍님 2019. 3. 12. 03:51

제르니움: (아, 졸려...)

 

꼭두새벽부터 일어난 나를 기다린 것은 거대한 욕실에서의 목욕이었다.

 

제르니움: (무슨 옛날 로마 귀족인 줄 알았네.)

 

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목욕탕에서 십수명의 메이드들의 보조를 받으며 목욕하는 건 좀 민망하긴 해도 괜찮은 경험이었다.

목욕이 끝난 뒤, 한창 나른한 타이밍에 등장한 하일 씨는 나를 식당으로 안내했다.

 

제르니움: 아침에도 진수성찬이네요.

하일: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하루를 시작하기 좋으니까요.

펜: 그래, 힘 쓰려면 많이 먹어야한다고.

제르니움: 아니라고!!!

하일: 아닙니다!!!

펜: 식사할 땐 조용히.

제르니움: ...

하일: ...

 

펜의 말에 나와 하일 씨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.

 

제르니움: (아무래도-)

제르니움: (엄청난 오해를 하는 것 같네, 펜.)

 

나는 한숨을 쉬며 식전 빵을 잘랐다.

 

펜: 코르네와 베르뮤트가 오기로 했어. 어제 말했는데, 기억하지?

하일: 네. 라이카님은 결국 불참하시는 건가요?

펜: 그 녀석은 조만간 숨쉬는 것도 귀찮아 할 거다. 마왕 직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게 용한 녀석이지.

하일: 하하, 슈밍이 아직 어리니까요.

 

나는 가만히 둘의 대화 속에 나온 코르네, 베르뮤트, 라이카에 대해 기억해보았다.

 

제르니움: (코르네 씨가 뒤에서 잘 안 나오려던 사람이고,)

제르니움: (베르뮤트 씨가 그 화려하게 생긴 사람이고-)

제르니움: (라이카 씨가 그 졸린 눈이었지, 아마?)

펜: 식사는 안 할 거야. 준비한 게 있다면 취소하도록 해.

하일: 네.

펜: 티푸드는 가벼운 걸로 준비했지?

하일: 네.

펜: ... 그런데.

 

펜이 갑자기 식사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.

 

펜: 하일.

하일: 네.

펜: 설마 네 신부를 저 상태로 내보이진 않을 테지?

제르니움: (... 저, 상태... 라니?)

 

제르니움: (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데.)

 

거울 속의 나는, 생각 외로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.

 

제르니움: 어때요, 하일 씨?

 

약간 자신감이 생겨, 하일 씨에게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에 대해 물었다.

 

하일: ...

제르니움: ...

하일: ...

제르니움: (... 왜 반응이 없지? 이상한 건가?)

제르니움: 저어, 하일 씨?

하일: 아, 죄송해요.

제르니움: 아니에요. 저기, 저 별로인가요? 뭔가 이상한 게 있어요?

하일: 아니요. 그게 아니라-

하일: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셔서요.

 

하일 씨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.

 

제르니움: 정말요?

하일: 네. 그런데-

제르니움: ...?

 

하일 씨가 내 뒤로 다가왔다.

 

하일: 등 뒤의 리본은 조금 더 조이는 게 좋겠네요.

하일: 너무 느슨해서 풀릴 것 같아요.

제르니움: 아...

제르니움: (사실 아까 더 조인다는 걸, 밥 먹고 배부르다고 그만 하라고 했는데...)

하일: 괜찮으시다면 제가 조여드릴까요?

제르니움: 응, 부탁해요.

하일: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.

제르니움: 네.

하일: 허리가 얇네요.

제르니움: 네? 전혀요...!

하일: ... 부서질 것 같아.

제르니움: (... 왜... 왜...)

하일: 다 됐어요.

제르니움: 고, 고마워요.

제르니움: (... 섹시했어, 방금.)

 

묘한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.

 

하일: 정원의 티 하우스 쪽으로 오시기로 하셨으니 먼저 나가있을까요?

하일: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햇볕을 쬐는 것도 좋을 거예요.

제르니움: 응, 좋아요.

 

아무리 넓다고는 해도 방은 방인터라, 다소 답답함이 느껴지던 참이었다.

 

제르니움: (하일 씨, 센스 있네.)

하일: 동쪽 분수대에서 티 하우스까진 얼마 걷지 않아도 되니까 그 쪽으로 이동할게요.

제르니움: 네.

하일: 그럼-.

 

하일 씨가 천천히 내민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.

전보다 자연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자세였다.

 

제르니움: 와, 예쁘다!

 

정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.

 

제르니움: (방 테라스에서 내려볼 때보다 훨씬 예쁘네!)

 

색색의 꽃들은 아침 햇살에 찬란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.

 

하일: 예쁘죠? 각 마왕성의 정원 중에서도 저희 성의 정원이 제일 아름답기로 유명해요.

제르니움: 정말요?

하일: 아무래도 동쪽에 있으니까요.

제르니움: 아-. 동쪽에 있었어요?

하일: 처음에 펜님이 동쪽의 마왕이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.

제르니움: 그랬었나?

 

나는 고개를 갸웃했다.

 

하일: 코르네님은 서쪽, 베르뮤트님은 북쪽이세요. 대화 도중에 나오는 경우는 없지만 알아두시는 게 좋아요.

제르니움: 네.

 

대답은 밝게 했지만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.

 

하일: 앗.

제르니움: 아, 괜찮아요!

 

돌부리에 걸려 잠시 휘청이다 이내 균형을 잡았다.

 

제르니움: 아, 구두가-

 

내가 허리를 숙이려하자 하일 씨가 나보다 먼저 허리를 숙였다.

 

하일: 인사할 때를 제외하고 제르니움님은 허리를 숙이지 않으셔도 돼요.

제르니움: 네? 하지만 스트랩이 풀려서요.

 

하일 씨는 대답 대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.

그리고는 직접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내 신발의 스트랩을 채워주었다.

 

하일: 그런 일은 제르니움님이 하지 않으셔도 돼요.

하일: 이런 걸 하기 위해 제가 제르니움님 곁에 있으니까요.

 

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하일 씨에게 또 다시 가슴이 뛰었다.

 

하일: 어때요, 신발은 편하신가요?

제르니움: 네, 네에-.

하일: 다행이네요. 그럼 계속 가실까요?

제르니움: 으, 응.

 

하일 씨는 방금 한 말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,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내 옆에 서서 걸었다.

 

제르니움: (이 사람은,)

제르니움: (방금 나한테 한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, 아는 걸까?)

 

그러다 문득, 마신의 명령엔 절대 복종한다던 얼굴이 생각났다.

 

제르니움: (... 마신이 결혼하라고 했으니까-)

제르니움: (방금의 말이나 친절도 명령 때문인 걸까.)

 

나는 조금은 씁쓸해진 기분으로 하일 씨의 옆 얼굴을 훔쳐보았다.

 

하일: 왜 그러세요?

제르니움: 아니에요. 날씨가 좋아서요.

하일: 그렇죠? 오늘은 햇빛도 많이 강하지 않아서 산책하기에도 좋네요.

제르니움: 응, 그러네요.

 

구두의 스트랩을 채워줄 때, 하일 씨의 손 끝과 닿았던 발목이-

 

제르니움: (어쩐지 애틋해서...)

 

확실히... 이상한 기분이었다.

 

티하우스에 앉아있자 여러 명의 하인들을 데리고 펜이 도착했다.

 

펜: 먼저 와있겠다는 이야긴 들었어. 산책이라도 했나?

하일: 네. 날씨가 좋아서요.

 

펜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.

 

펜: 하일, 너도 앉아.

하일: 아.

 

하일 씨는 약간 놀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.

 

펜: 이 녀석과 결혼하면 네가 마왕이다. 지금처럼 행동해선 곤란하다.

하일: 네, 주의하겠습니다.

 

펜은 시종이 따라주는 홍차를 마시고 눈살을 찌푸렸다.

 

펜: 이 홍차, 베르뮤트가 알러지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나?

하일: 네?

 

하일 씨는 차를 한 모금 마셔보더니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.

 

펜: 오늘의 홍차를 선정한 자는, 하일 너인가?

하일: 죄송합니다.

펜: ...

 

펜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내려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.

 

펜: 동일한 계급에 대한 접객은 아무리 마왕일지라도 직접 준비하는 게 관례다.

펜: 이런 실수를 계속 반복했다간 아무리 차기 마왕이라고 해도 네게 벌을 내릴 수 밖에 없다.

하일: 죄송합니다.

펜: 너, 주방에 전해. 홍차를 바꾸라고.

하일: 아닙니다.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.

 

펜은 하일 씨를 바라보곤 알아서 해, 가볍게 한 마리 툭 던졌다.

그러자 하일 씨가 눈 앞에서 바로 사라져버렸다.

 

제르니움: (하일 씨, 완전 풀 죽은 얼굴이던데.)

 

나는 하일 씨가 사라진 빈 자리를 바라보았다.

 

제르니움: (불쌍해.)

펜: -너.

 

펜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.

 

제르니움: 나, 나, 아니, 저, 저요?

펜: 어제는 아니라니<까>하고 잘 받아치던데.

펜: 옷이 바뀌니 말투도 바뀌는 건가?

제르니움: 아.

 

어제 하일 씨 위에 넘어졌던 게 생각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.

 

펜: 편하게 말해도 돼. 어차피 너는 마왕의 비가 될 사람이니 나와의 계급차이도 없고.

제르니움: 으, 응.

펜: 그래서-

펜: 하일은 어떻지?

제르니움: 어?

 

펜은 짜증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.

 

펜: 두 번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.

펜: 하일 녀석, 어떻냐고 물었다.

제르니움: 하일 씨? 어쩐지 친근해서 좋아.

펜: 뭐, 좋아.

 

펜이 고개를 끄덕였다.

 

펜: 그 정도 대답이면 훌륭하다.

제르니움: 응?

 

항상 뚱한 표정의 펜이 미소 짓는 건 처음 봐서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.

 

펜: 어쨌든 너, 하일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?

제르니움: (여기 사람들은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좋고 싫고를 가리는 거지.)

제르니움: 아니야.

펜: 그래, 그 정도 대답이면 일단 만족한다.

제르니움: 그러니까 뭘 만족한다는 거야?

펜: 베르뮤트 녀석이나 그럴 일은 없지만 라이카, 코르네 녀석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건지 물은 거다.

제르니움: 흔들려?

하일: 결혼 상대를 하일이 아닌 다른 녀석으로 바꾼다든가.

제르니움: ...

 

나는 가만히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봤다.

 

제르니움: 아니,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.

펜: 하일을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거면 안심이다.

제르니움: (좋아하는 게 아니라, 하일 씨가 제일 정상인이라 바꿀 일 없다는 뜻인데...)

 

어쩐지 변명하고 싶지 않아서,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.

하일 씨가 새 홍차와 함께 등장하고 티 테이블의 세팅이 바뀌었다.

세팅까지 바꿀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진중한 얼굴로 지시를 내리는 하일 씨는 역시 잘생겨서- 아무 말 하지 않았다.

 

제르니움: (으음, 잘생겼단 말이지. 역시.)

 

하일 씨의 엄숙한 표정을 훔쳐보며 약간 설레였던 것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.

 

베르뮤트: 아아, 동쪽은 역시 날씨가 좋다니까.

코르네: 그러게요. 춥지도 않고.

 

베르뮤트 씨와 코르네 씨는 테이블 세팅이 완료된 직후에 도착했다.

 

베르뮤트: 그 때보다 훨씬 더 귀엽게 변했네, 제르니움.

베르뮤트: 아쉽다니까. 이렇게 귀여운 여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다니.

 

베르뮤트 씨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우는 소릴 했다.

 

제르니움: 하, 하하.

제르니움: (여전히 능글 맞은 사람이네, 이 사람은.)

제르니움: (그에 비해 저 쪽은...)

 

코르네 씨는 계속 나를 보며 안절부절 못 했다.

 

제르니움: (왜 저러는 거지? 내가 뭔가 이상한 건가?)

 

나는 차 받침 위에 올려진 티스푼에 어스름풋하게 비추는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.

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.

 

코르네: 으, 음-, 음.

 

코르네 씨는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홍차를 들어마셨다.

 

코르네: 앗!

 

그러다 손을 떠는 바람에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.

 

코르네: 죄, 죄송합니다...

제르니움: 어머, 괜찮으세요?

 

나는 얼른 냅킨을 들어다 코르네 씨에게 건넸다.

코르네 씨는 허벅지 위에 쏟아진 홍차가 뜨거운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내가 내민 냅킨은 받지 않았다.

 

코르네: 고, 고맙, 고맙습니다만, 저, 저는, 저기-...

베르뮤트: 아, 제르니움. 너무 속상해하지 마. 코르네는 여성 공포증이거든.

제르니움: 여, 여성 공포증?

펜: 지금은 태평하게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.

 

그렇게 말하고 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.

그러자 코르네 씨의 바지 위의 홍차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.

 

베르뮤트: 그치만 다른 지방에선 마법을 쓸 수 없는 걸.

펜: 마계의 규율에 대해 이제와서 왈가왈부 하지 말 것.

베르뮤트: 네, 네. 펜은 까칠하다니까.

제르니움: (저, 정신 없어.)

 

한바탕 소동이 정리되고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.

 

코르네: 죄, 죄송합니다. 저는 제르니움님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-...

코르네: 생리적인 현상입니다. 여성 공포증은...

 

코르네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.

 

제르니움: (여성 공포증이라니, 처음 보는 증상인데.)

제르니움: 아니에요. 어쩔 수 없는 일인데요, 뭘.

 

공포증은 어쩔 수 없는 걸 알아서 딱히 상처 받지는 않았다.

 

베르뮤트: 말도 예쁘게 하네, 제르니움.

제르니움: 가, 감사합니다.

제르니움: (... 당황스럽다니까, 이 사람은.)

 

베르뮤트 씨의 끈질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.

 

펜: ... 하일.

하일: 네?

 

상황이 좀 정리된 듯 싶었을 때, 펜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.

 

펜: 티스푼.

하일: 아.

 

하일 씨는 슬쩍, 펜의 찻잔을 바라보고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.

 

제르니움: (아, 티스푼이 없구나.)

하일: 죄송합니다.

펜: ... 아니야. 지금 발견한 내 쪽의 실수도 있다.

하일: 지금 준비하겠습니다.

펜: 아니,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.

하일: 아닙니다.

 

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. 그러자 하일 씨가 아까처럼 사라져버렸다.

 

베르뮤트: ...

코르네: ...

펜: ...

제르니움: ...

 

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.

 

제르니움: 저기, 펜.

펜: 뭐지?

 

나는 조심스럽게 펜을 불렀다.

 

제르니움: 티스푼이 없다고 꼭 하일 씨를 시켜야 해?

펜: 나는 저 녀석을 시킨 적이 없어.

제르니움: 그치만 테이블 세팅은 하일 씨의 담당이었잖아. 펜이 굳이 거기서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지 않았어?

펜: 흐음.

베르뮤트: 오.

코르네: ...

 

순간 베르뮤트 씨와 코르네 씨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.

 

베르뮤트: 벌써부터 남편을 감싸는 거야?

베르뮤트: 아, 나는 언제 저런 보호를 받아보나.

펜: ... 제르니움.

제르니움: 응?

펜: 네가 말했지. 테이블 세팅은 하일의 몫이었다고.

제르니움: 응.

펜: 그렇다면 저 녀석은 자신의 실수에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.

제르니움: 아니, 내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굳이 하나하나 지적할 필요가 있냐는 거야.

펜: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건 뭐지?

제르니움: 뭐?

펜: 티스푼의 용도가 홍차를 젓는 것에 그쳐서,

펜: 아니면 티스푼의 크기가 작아서,

펜: 아니면 티스푼이 네가 볼 때 별 것 아니라서,

펜: 어떤 게 ‘중요하지 않은 일’이 되는 원인이지?

제르니움: 뭐? 아니, 왜 그렇게 쪼...

 

<쪼잔하게>라는 말을 하려다가 나는 급하게 단어를 삼켰다.

 

펜: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는다. 그것이 마왕이라는 직함의 책임이다.

펜: 이 마계를 통치하는 자에겐 그 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.

펜: 네 입장에서는 고작 티스푼 하나 때문에 왔다갔다 하는 게 이해가 안 되겠지만

펜: 이게 마계의 관습이다.

펜: 애초부터 하일 녀석이 처음부터 완벽했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, 이 일은.

 

써온 것처럼 정리된 펜의 말에 딱히-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.

 

베르뮤트: 뭐, 하일이 한두개씩 빠뜨리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까.

코르네: 예전에 빈 테이블에 앉혔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지요.

펜: ... 언제쯤 실수를 하지 않을지.

 

펜은 씁쓸한 얼굴로 하일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.

 

제르니움: (하일 씨, 실수 자주 하는 건가.)

 

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.

 

제르니움: 하일 씨, 자주 실수해?

펜: 네 앞에선 언제나 완벽했나?

제르니움: ...

 

차마 빈 말로라도 응이라고 할 수 없었다.

 

제르니움: (확실히 좀 어리버리한 구석이 있지.)

제르니움: (생각보다 잘 넘어지고, 뭔갈 잘 빠트리는 느낌이랄까...)

펜: 뭐, 차기 마왕 직함에 처음 올랐을 때보다는 확실히 나아졌다.

제르니움: ... 차기 마왕 말이야, 저런 잔심부름도 해야해?

펜: 마계의 규율이다.

제르니움: ... 그럼 너도 했어?

 

저 펜이 티스푼을 가져오느라 주방을 기웃거린다니...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.

 

펜: 이 내가 어째서 그런 일을 해야하지?

제르니움: 뭐?

베르뮤트: 아, 펜은 이전 동쪽 마왕의 아들이야.

베르뮤트: 이전 동쪽 마왕만큼 강하기 때문에, 혈족 계승으로 날 때부터 마왕이거든.

베르뮤트: 하일이랑은 다른 케이스지.

제르니움: 아, 왕자? 그럼 하일 씨는요?

펜: 나는 후대를 낳을 계획이 없다.

펜: 하일은 나를 제외하고 동쪽에서 가장 강해. 그렇기에 다음 마왕 후보인거지.

제르니움: (하일 씨, 엄청 강한가보구나.)

 

강하다는 건 하일 씨와는 잘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다.

 

펜: ... 후.

 

펜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.

 

펜: (어린애처럼 생겨서, 갑자기 웬 한숨.)

펜: 날 때부터 마왕으로 길러진 자만큼 하란 건 아니지만

펜: 지나치게 허술하고 마음이 약하다, 하일은.

베르뮤트: 동의하는 바야.

코르네: 그게 하일 씨의 장점이 되기도 하죠.

펜: 하지만 마왕은 그래서는 안 되는 자리야.

베르뮤트: 아, 거기에도 동의해.

코르네: 어느 정도는요.

 

문득, 하일 씨가 스스로에게 지나칠 정도로 자신이 없던 게 생각났다.

 

제르니움: (어쩌면... 이런 것들 때문일까?)

 

나는 돌아오지 않는 하일 씨의 자리를 바라보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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